오늘은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정책의 추진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개화파의 형성과 분화와 정부의 개화정책으로 어떤것이 있었는지 알 수 있는 시간이 될것 같습니다. 그럼지금부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정책의 추진을 확인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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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화파의 형성과 분화 ■ 정부의 개화정책 |
개화파의 형성과 분화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정책의 추진으로 개화파의 형성과 분화를 확인해보겠습니다. 개화파의 형성은 북학파 실학자인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이후에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등의 영향을 받은 김옥균, 박영효, 김윤식 등이 개화파를 형성하였습니다. 이들은 1880년대부터 정계에 진출하였고 정부의 개화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들 개화파는 온건 개화파와 급진 개화파로 분화되었습니다. 온건 개화파는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민영익을 중심으로 민씨정권과 결탁하였고 반일 친청 정책을 주장하였습니다. 온건 개화파는 동도서기로에 입각한 점진적 개혁을 추구하였고 청의 양무운동을 모델로 정책을 펼쳤습니다. 온건 개화파는 김윤식의 상소문을 보면 서양에서 유행하고 있는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유포되는 것은 금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부족한 것은 기술뿐이기때문에 그 기술만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과학 기술문명은 인간의 도리에 해롭지 않고 백성들이 살사가는데 도움이 되기때문에 이를 배워야 합니다. 서양에서 들여온 서적에 과학 기술 문명에 대한 설명이 나와있는데 이오늘날 우리가 구하여 활용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급진 개화파는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을 중심으로 청의 내정간섭과 민씨 정권의 친청정책을 반대하였습니다. 급진 개화파는 서양의 과학 기술뿐아니라 사상과 제도까지 도입하는 급진적인 개혁을 추구하였고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정책을 펼쳤습니다. 급진 개화파는 김옥균의 치도약론에 따르면 오늘날의 급선무는 반드시 인재를 등용하며 국가 재정을 절약하고 사치를 억제하며 문호를 개방하고 이웃들과 친선을 도모하는데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나의 생각에는 실사구시하는 것이 제일이라고 여겨진다... 일본은 법을 변경한 이후에 모든 것을 경장했다고 들었다라고 적혀있습니다.
정부의 개화정책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정책의 추진으로 정부의 개화정책을 확인해보겠습니다. 정부는 일본에 파견된 수신사의 시찰 의견을 바탕으로 개화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수신사는 종래의 통신사 대신 개항이후 수신사로 이름을 바꾸어 일본에 파견한 사절단으로 총4차례 파견하였습니다. 1기는 김기수가 근대 문물을 시찰하였고 2차는 김홍집이 조선책략을 가지고 귀국하였습니다. 정부개혁정책으로 제도를 개혁하였습니다. 1880년에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였습니다. 그 아래 실무를 담당하는 12사를 두고 개화정책을 총괄하였습니다. 통리기무아문은 개항 이후 대외 관계의 변화에 대비하여 외교와 국방에 힘쓰고 신식 무기 수입등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설립된 정부기구입니다. 12사는 외교, 군사, 통상, 재정, 외국어, 교육 등과 관련된 개혁행정을 분담하였습니다. 군사제도는 5군영에서 2영으로 개편하였습니다. 2영으로는 무위영과 장어영이있습니다. 그리고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설치하였습니다. 별기군은 일본인 교관을 초빙하여 근대식 군사훈련을 시키고 사관생도를 양성하였습니다. 정부는 해외에 시찰단 파견하였습니다. 일본으로 수신사를 파견하였고 1881년 일본으로 조사 시찰단을 파견하였습니다. 조사 시찰단은 김홍집의 건의로 박정양, 어윤중, 홍영식 등 파견 하여 일본의 정부기관과 학교, 산업, 군사 등 근대시설을 시찰하고 법률과 조세 제도등을 조사하였습니다. 이것은 개화정책을 뒷받침해주었습니다. 1881년 9월에는 청므로 영선사를 파견하였습니다. 김윤식 등이 파견되었는데 근대 무기 제조기술과 군사 훈련법을 습득해왔습니다. 이것은 1883년 기기창 설치로 이어졌습니다. 기기창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무기 제조공장입니다.
지금까지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정책의 추진을 알아보면서 개화파의 형성과 분화, 정부의 개화정책을 함께 확인해보았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조금 알아가는 유익한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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