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역사

흥선 대원군의 정치

7세븐 2022. 8. 25. 06:00

 

오늘은 흥선 대원군의 정치를 알아보겠습니다. 흥선 대원군의 정치는 왕권을 강화하고 민생안정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흥선 대원군은 쇄국 정책과정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지금부터 흥선 대원군의 정치를 확인해보겠습니다. 

 

 

<목차>
■ 19세기 조선의 정세
■ 흥선 대원군의 개혁정치
■ 흥선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
■ 본문4

19세기 조선의 정세

흥선 대원군의 정치로 먼저 19세기 조선의 정세를 알아보겠습니다. 조선은 세도 정치로 정치기강이 문란해졌고 부정부패와 농민 봉기가 발발하였으며 천주교와 동학이 확산되었습니다. 국외로는 이양선의 출몰과 통상을 요구하는 것이 많아졌고 러시아의 연해차지등으로 위기의식이 고조되었습니다. 이양선은 조선 후기 우리나라연해에 나타난 서양의 선박으로 우리선박과 모양새가 달랐기때문에 이양선이라 불렀습니다. 철종이 사망하고 1863년 12세였던 고종이 즉위하였습니다. 1863년~1873년까지 흥선 대원군(이하응)이 섭정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총명하고 행동이 비범하여 어려서부터 늘 세도정치가들의 감시에 시달렸습니다. 이를 피하자 그는 시정의 무뢰배들과 어울려 놀았고 때로는 곤궁함을 드러내며 세도가들에게 금품을 구걸하여 조롱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철종이 승하하고 자신의 어린 아들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는 대원군이 되어국정을 장악하였습니다. 

흥선 대원군의 개혁정치

흥선 대원군의 정치로 흥선 대원군의 개혁정치를 알아보겠습니다. 흥선대원군은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습니다. 안동 김씨축출, 능력에 따른 인재등용,세도정치폐단을 개혁하였습니다.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의 기능을 회복하였으며 삼군부를 부활습니다. 법전을 정비해서 통치 규범을 정리하였습니다. 국방강화를 위해 서양의 화포 기술을 도입하고 수군강화와 해안지대에 보루를 설치하였습니다. 흥선 대원군은 수취 체제도 개편하였습니다. 이는 삼정의 문란 시정으로 민생안정및 국가재정확충을 위한것이었습니다. 전정은 양전을 실시해서 조세 부과대상에서 빠진 토지에 세금을 징수하고 불법적토지겸병을 금지하였습니다. 군정으로는 1871년 호포제를 실시하고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하였습니다. 환곡은 사창제를 실시하였고 아전의 간여배제, 지역민 자치로 운영하였습니다. 사창은 지방행정조직의 가장 말단 조직인 리 단위로 설치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정치는 서원을 철폐하였습니다. 만동묘를 철폐하써 였습니다. 만동묘는 임진왜란 때 도와준 명나라 신종을 제사 지내기 위해 숙종때 지은사당입니다. 붕당의 근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하여 47개소만 남았습니다. 민생 안정 및 국가 재정확충을 위해 서원 소유토지, 노비를 몰수하였습니다. 이는 백성들은 환영하였지만 양반유생의 강력한 반발이 있었습니다. 1865년~1872년까지 경복궁을 중건하였습니다. 경복궁 중건을 위해 많은 농민을 공사에 동원하고 양반 묘지림을 벌목하고 강제 기부금인 원납전 징수하였습니다. 토지 1결당 1백문의 특별세인 결두전을 부과하였고 통행세를 부과하였습니다. 당백전을 발행해서 물가가 급등하였고 이로 인해 양반과 백성의 원성이 고조되었습니다. 당백전은 당시 통용되고 있던 상평통보의 200배에 해당하지만 실제가치는 그204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해 물가 폭등과 유통질서의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흥선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

흥선 대원군의 정치로 흥선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알아보겠습니다. 1866년 천주교가 확산하면서 프랑스선교사의 활동과 교세가 확장하였고 이로 인해 서양 배척여론이 대두되었습니다. 흥선 대원군은 프랑스세력을 이용해서 러시아견제를 도모하였지만 실패하였습니다. 1866년1월 프랑스신도9명과 수천명의 천주교 신자 처형하는 병인박해가 일어났습니다.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였고 조선의 퇴거 요구에 불응하면서 살상과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이에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의 지휘아래에 1866년7월 관민이 제너럴 셔먼호를 소각시켰습니다. 1866년 9월에는 병인양요가 발생하였습니다. 병인양요는 병인박해 당시 프랑스신부의 처형을 구실로 프랑스가 조선을 침략한것이었습니다. 프랑스의 로즈 제독이 7척의 군함으로 강화부를 점령하였고 한성근 부대는 문수산성에서 양헌수 부대는 정족산성에서 프랑스를 격퇴하였습니다. 프랑스는 철수하면서 외규장각도서를 약탈하였고 이에 흥선 대원군은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강화하였습니다. 외규장각은 정조가 1782년왕실관련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세운 규장각의 부속 도서관으로 병인양요때 수천권의 책이 소실되었고 의궤를 비롯한 수백 권의 문서와 은괴등이 약탈되었습니다. 약탈된 도서는 145년만 인2011년에 응구 임대형식으로 반환되었습니다. 1868년에는 오페르트 도굴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는 서양인에 대한 반발감이 확산되었고 통상을 거절당한 독일상인 오페르트가 무장한 선원과 함께 덕산군 관아를 습격해서 남연군 묘 도굴을 시도하였지만 주민의 저항으로 실패하였습니다. 1871년에 신미양요가 발생하였습니다. 신미양요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미국이 조선에 배상금 지불과 통상을 요구하였습니다. 로저스 제독의 강화도침략으로 인해 초지진, 덕진진이 함락당했습니다. 광성보에서 어재연의 결사 항전이있었고 어재연 장군은 전사하였고 수자기는 약탈당했습니다. 미국이 철수하고 흥선 대원군은 척화비를 건립하여 통상 수교 거부정책의지를 천명하였습니다. 척화비는 서양 오랑캐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일이라고 새겼습니다. 흥선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은 서야 세력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저지는 할 수 있었지만 변화하는 세계정세에 대처가 미흡하였고 조선의 근대화가 지역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흥선 대원군의 정치로 19세기 조선의 정세, 흥선 대원군의 개혁정치, 흥선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조금 알아볼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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