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역사

서양 세력의 접근과 흥선 대원군의 정치

7세븐 2022. 8. 18. 06:00

오늘은 서양 세력의 접근과 흥선 대원군의 정치를 알아보겠습니다. 서양 세력의 접근과 흥선 대원군의 정치에서는 흥선 대원군의 개혁 정치와 병인 박해, 제너럴 셔만 언호 사건, 병인 양요, 오페르트 도굴 사건, 신미 양요, 척화비 건립등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목차>
■ 흥선 대원군의 개혁 정치
■ 중국의 개항과 일본의 개항
■ 병인박해와 제너럴 셔먼호 사건
■ 병인양요와 오페르트 도굴사건
■ 신미양요와 척화비

흥선 대원군의 개혁 정치

서양 세력의 접근과 흥선 대원군의 정치에서 흥선 대원군의 개혁 정치를 알아보겠습니다. 흥선 대원군은 종친을 높이고 세도 가문을 몰아내서 왕권을 강화하고자하였습니다. 호포법을 제정해서 군포가 면제 되던 양반에게도 군포를 1필씩 징수하였고 만동묘를 포함한 서원을 47곳있제외하고 철폐하였습니다. 스스로 내는 돈이라는 뜻인 원납전을 징수하였는데 겅복궁 중건을 위해 강제 기부금이었습니다. 세도 정치의 폐단이 심화하였고 홍경래의 난과 임술 농민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동학과 천주교가 확산되었습니다. 흥선 대원군은 세도 정치를 타파하고 의정부의 기능을 회복하며 삼군부를 부활시켰습니다. 흥선 대원군은 민생 안정 정책으로 삼정의 문란 개혁을 실시하였습니다. 전정의 문란은 양전 사업을 실시하였고 군정의 문란은 호포제를 실시하였고 환곡의 문란은 사창제를 실시하였습니다. 국외로는 이양선들이 자주 출몰을 하였고 러시아가 연해주를 차지하였습니다. 서양 세력의 침략적 접근에 따른 사회불안이 고조 되고 있었습니다. 

중국의 개항과 일본의 개항

서양 세력의 접근과 흥선 대원군의 정치에서 중국의 개항을 알아보겠습니다. 1,2차 아편전쟁의 패배로 중국은 영국에 홍콩을 할양하고 러시아에 연해주를 할양하였습니다. 중국의 무기로는 서양세력과 맞설 수 없기때문에 서양 세력에 눌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홍장은 중국의 유교문화를 중심으로 하되, 서양의 과학 기술을 도입하자는 중체서용을 바탕으로 양무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는 서양의 과학 기술과 제도까지 도입하여서 개화를 추구하자는 문명개화를론을 주장하였고 이 주장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의 기본 사상이 되었습니다. 

병인박해와 제너럴 셔먼호 사건

서양 세력의 접근과 흥선 대원구의 정치에서 병인 박해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알아보겠습니다. 흥선대원군은 1866년 천주교를 탄압하여 프랑스선교사와 신도들을 처형하였습니다. 프랑스주교 2인과 선교사 9인 그리고  조선인 신도 다수를 살해하였다고 합니다. 1866년 7월에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 대동강으로 들어와 난동을 부리자 평안도 감사 박규수와 군민들이 힘을 합쳐서 조총과 화살을 난사하고 서로 도와 불태워 버렸습니다. 

병인양요와 오페르트 도굴 사건

서양 세력의 접근과 흥선 대원군의 정치에서 병인양요와 오페르트 도굴 사건을 알아보겠습니다. 1866년 9월에는 병인양요가 있었습니다. 양헌수는 순무천총으로 있었고 정족산성에서 몰래 전등사로 가서 주둔하였습니다. 전등사는 높은  산 위라 매복하였다가 한꺼번에 북과 나발을 불며 좌우에서 총을 쏘았고 이 전투로 프랑스군에 승리하였유며 한성근은 무수산성에서 승리하였습니다. 1868년 4월에는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통상 요구가 계속 실패를 하자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는 것을 시도하였습니다. 이런 사건들은 백성들이 서양 세력에 대한 반감을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신미양요와 척화비

서양 세력의 접근과 흥선 대원군의 정치에서 신미양요와 척화비를 알아보겠습니다. 지난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해서 미국은 로저스 함대를 보내서 강화도를 침략하였습니다. 이양선들이 광성진으로 나가려고 하자 연안을 경비하고 있던 어재연의 관군은 미군에게 완강하게 저항을 하였습니다. 포격을 가했고 진진과 초지진에서도 합세하여서 그들을 공격하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어재연 장군은 전사하였고 사망한 군사도 매우 많았습니다. 신미양요 이후에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움으로서 통상 수교 거부 의지를 널리 알렸습니다. 척화비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우리들 자손 만대에 경계하노라. 병인년(1866)에 짓고 신미년(1871)에 세우게 됩니다.

 

지금까지 서양 세력의 접근과 흥선 대원군의 정치를 알아보면서 흥선 대원군의 개혁 정치, 중국의 개항과 일본의 개항, 병인박해와 제너럴 셔먼호 사건, 병인양요와 오페르트 도굴 사건, 신미양요와 척화비를 함께 알아보았습니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조금 알아보는 유익한 시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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