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원의 내정 간섭과 공민왕의 개혁 정치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려는 개경 환도와 몽골과의 강화 이후 약 100년 동안 원의 내정 간섭과 공민왕의 개혁 정치가 있었습니다. 원나라는 징기스칸 이죽고 난 뒤 쿠빌라이 칸에 의해서 중국본토를 중심으로 아시아전체를 지배하게 된 몽골의 왕조입니다. 몽골과 고려의 독립국 지위를 유지하고 풍속과 제도를 존중하겠다는 조건이 있었지만 고려의 왕은 어릴 때 원나라로 가서 교육을 받고 원나라 공주와 결혼을 하고 고려로 와서 왕이 될 수 있었고 그 이후부터 원나라의 간섭이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원의 내정 간섭과 공민왕의 개혁 정치를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원의 내정 간섭
원의 내정 간섭과 공민왕의 개혁 정치에서 원나라의 내정 간섭은 고려의 왕은 조나 종을 붙이던 시호를 충렬왕, 충숙왕, 충목왕등의 이름으로 짓게 하였습니다. 앞에충이붙은 것은 고려가 원에 충성한다는 의미입니다. 고려의 왕이 원나라공주와 결혼을 하고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었습니다. 원의 내정 간섭과 공민왕의 개혁 정치에서 원나라의 내정 간섭은 고려가 원나라에 많은 공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고려의 특산물 금, 은, 매 등을 원나라에 보내야 했고 원나라에 매를 보내기 위해 매를 기르는 관청인 응방을 만들었습니다. 원의 내정 간섭 시기에 100년간 고려는 수천 명의 여자들이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갔습니다. 공녀들은 원나라의 궁녀가 되거나 귀족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중 몇몇은 부유한 생활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대표적으로 기황후가 있습니다. 기황후는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가서 궁궐에서 일하는 궁녀로 지내다 순제가 마음에 들어서 황후가 되어서 기황후가 되었고 기황후의 오래비는 고려에서 온갖 위세를 부리는 권문세족이되었습니다. 원의 내정 간섭과 공민왕의 개혁 정치에서 원나라는 제주도의 나무를 베어내고 풀을 심어서 초지를 가꾸어 말을 기르기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려는 원나라의 일본원정전투를 위한 인력과 물자를 동원하기 위해 정동행성이라는 관청을 두어서 물자를 징발하고 다루가치를 두어서 고려의 백성의 생활을 감시하였습니다. 원의 내정 간섭과 공민왕의 개혁 정치에서 원나라의 내정 간섭으로 인해서 권문세족이 성장하였습니다. 권문세족은 몽골어를 잘하는 출신과 친원파들이 관직을 독점하였고 막대한 농장을 소유하고 가난한 농민을 노비로 삼는 등 고려말의 지배세력이었습니다.
공민왕의 개혁 정치
원의 내정 간섭과 공민왕의 개혁 정치에서 공민왕의 개혁 정치를 알아보겠습니다. 고려는 충렬왕시기부터 조금씩 반원 정치를 하였습니다. 동녕부와 탐라총관부를 반환받고 원나라의 관리의 횡포를 막았습니다. 공민왕은 14세기 중엽 원 명 교체기에 반원 자주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공민왕의 개혁 정치는 친원파를 숙청하고 정동행성이문소를 폐지하였습니다. 쌍성총관부를 공격해서 철령이이북의 영토를 회복하였습니다. 몽골풍을 금지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정방을 폐지함으로서 왕이 인사권을 장악하고 선진사대부를 즉극 등용하는 과거 제도를 정비하였습니다. 권문세족이 불법적으로 차지한 토지를 주인에게 돌려주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사람을 해방시켜주기 위해서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였습니다. 공민왕의 개혁 정치에서 공민왕시기에 신진 사대부는 지방 향리, 중소 지주 출신, 성리학 수용, 과거를 통해 중앙관리로 진츌하였습니다. 공민왕이 1374년에 피살당하면서 공민왕의 개혁이 실패하였습니다. 신진 사대부는 신흥무인세력이었고 우왕때 독립적인 정치세력을 형성하게되었습니다. 하지만 신진사대부는 고려왕조를 유지하자와 역성혁명을 주장하는 급진파와 온건파로 나누어집니다.
지금까지 원의 내정 간섭과 공민왕의 개혁 정치를 알아보았습니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조금 알아가는 시간이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상으로 원의 내정 간섭과 공민왕의 개혁 정치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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