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항일 의병 투쟁과 의열 활동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항일 의병 투쟁이 전개는 어떻게 진행이 되었는지 , 의열 활동은 어떻게 활동하였는지 함께 알아보면서 항일 의병 투쟁과 의열 활동을 확인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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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병 투쟁의 전개 ■ 의병 투쟁의 위축 ■ 의열 활동 |
의병 투쟁의 전개
항일 의병 투쟁과 의열 활동을 알아보면서 의병 투쟁의 전개는 어떻게 이루어 졌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을미의병이 일어났습니다. 을미의병의 주도 세력은 유인석, 이소응 등의 양반 유생 의병장과 농민, 동학 농민군 잔여 세력이 주도하였습니다. 을미의병은 임금을 숭상하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존왕양이를 표방하였고 단발령 철회와 고종의 해산 권고 조칙에 따라 해산되었습니다. 이후 일부 농민군이나 행상, 유민, 노동자, 걸인등이 만든 무장조직인 활빈당을 조직하여서 반침략, 반봉건 투쟁을 계속하였습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인해서 외교권이 박탈되자 을사의병이 일어났습니다. 민종식, 최익현등의 양반 유생 의병장들과 신돌석같은 평민 출신의 의병장이 주도하였습니다. 신돌석은 경북, 영행, 평해 지역의 산악지대에서 유격 전술로 일본군에게 타격을 가하였습니다. 이들은 을사조약 폐기를 요구하였고 평민 출신의 의병장이 등장한 특징이 있습니다. 1907년 고종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이 되면서 정미의병이 일어났습니다. 정미의병은 유생, 논민, 해산 군인, 노동자 등 다양한 계층들이 주도하였습니다. 해산 군인이 가담하면서 전투력과 조직력이 증강되었고 13도 창의군이 결정되었습니다. 13로 창의군은 의병 연합 부대로 이인영이 창의대장, 허위군사장이었고 이들은 각국 공사관에 공문을 보내 의병을 국제법상 교전 단체로 인정해줄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들은 1908년 서울 진공 작전을 전개하기로 하였습니다.
의병 투쟁의 위축
항일 의병 투쟁과 의열 활동을 알아보면서 의병 투쟁의 위축을 알아보겠습니다. 한국의 국권 강탈을 앞둔 일제는 1909년 의병 활동의 근절을 명분으로 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군사 작전을 전개하여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였으며 이로 인해서 의병활동이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남한 대토벌 작전 이후 의병들은 만주. 연해주로 이동해서 무장 독립 투쟁을 계속해서 전개하였습니다.
의열 활동
항일 의병 투쟁과 의열 활동을 알아보면서 의열 활동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나철과 오기호는 단군 신앙을 바탕으로 대종교를 창시하였고 자신회라는 5적 암살단을 조직하여 을사오적 습격을 하였습니다. 장인환과 전명운은 제1차 한. 일 협약으로 외교 고문으로 활동한 스티븐스가 1908년 미국으로 돌아가서 일제의 한국 침략이 정당하다고 주장하자 1908년 스티븐스를 사살하였습니다. 1909년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고 이재명은 1909년 이완용을 살해하는 것을 시도하였습니다.
지금까지 항일 의병 투쟁과 의열 활동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의병 투쟁의 전개, 의병 투쟁의 우축, 의열 활동은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함께 확인해보았습니다. 대한민국 역사를 조금 알아가는 유익한 시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