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역사

통일 신라와 발해의 경제 사회

7세븐 2022. 8. 4. 06:00

오늘은 통일 신라와 발행의 경제 사회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삼국시대를 신라가 통일을 하면서 통일 신라와 발행의 경제 사회로 넘어갔습니다. 지금부터 통일 신라와 발해의 경제 사회를 확인하겠습니다. 

 

통일 신라의 경제

통일 신라와 발해의 경제 사회에서 첫 번째로 통일 신라의 경제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통일 신라의 경제는 먼저 토지제도로는 신문왕 687년에 관료전을 지급하였습니다. 관료전은 조세 수취만 가능하여 귀족들의 농민 지배력이 약하였습니다. 성덕왕 722년에는 정전을 지금하였습니다. 정전은 백성에게 지급하는 것으로 귀족이 백성로부터 사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막고 농경제의 안정을 추구하려는 목적에서 시행하였습니다.  경덕왕 757년에는 녹읍을 부활시켰습니다. 녹읍은 국가에서 관료 귀족에게 지급한 일정지역의 토지로 조세 수취와 거주민의 노동력징발이 가능하였습니다. 통일 신라의 경제활동은 농업생산력이 증가하였고 경주에 서시와 남시를 설치하였습니다. 왕실과 귀족의 우요품공급을 위한 관청정비로 수공업을 하였습니다. 대외적으로 당과 교류하며 유학생과 승려, 상인의 왕래가 활발하였습니다. 통일 신라의 경제는 울산항과 당향성과 영암에서 당과 일본, 이슬람 상인과 교류하였습니다. 장보고의 활약으로 청해진을 설치하여 남해와 황해의 해상 무역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청해진은 해적의 소탕을 위해 장보고가 완도에 설치한 기지입니다. 통일신라는 당과의 교역이 확대되면서 신라방, 신라소,신라원,신라관을 설치하였습니다. 신라인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마을을 신라방이라하였고 신라방을 관리하는 관청을 신라소라고 하였습니다. 신라인을 위한 사찰을 신라원, 신라 사신, 유학생, 승려등이 숙박할 수 있는 신라관이 있었습니다. 

 

통일 신라의 사회

통일 신라와 발해의 경제 사회에서 통일 신라의 사회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통일 신라의 사회는 중앙 관청의 장관직을 독점하였습니다. 금입택이라는 저택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진골귀족이있었습니다. 6두품이라는 학문적 식견과 실무능력을 바탕으로 정계진출하였습니다. 신분상의 제약을 가졌습니다. 향과 부곡인들은 일반인에 비해서 더많은 공물을 부담하였습니다. 

 

발해의 경제

통일 신라와 발해의 경제 사회에서 발해의 경제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발해의 경제는 조세로 조와 콩과 보리를 납세하였습니다. 공물로는 베와 명주와 가죽을 공물로 바쳤습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벼농사를 지었지만 밭농사중심이었고 목축업이 발달하며 모피와 녹용과 사향을 생산하는 수렵도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금속가공업과 철과 구리를 제련하는 수공업과 어업과 상업도 발달하였습니다. 발해의 경제는 대외교류로 활발하였습니다. 조공도와 영주도를 이용하여 당과 교류하였고 산퉁반도등주에 발해관을 설치하여 당과 교류하였습니다. 신라와는 신라도를 이용하여 교류하였고 거란도와 일본도를 이용해서 거란과 일본과도 교역을 하였습니다. 

 

발해의 사회

통일 신라와 발해의 경제 사회에서 발해의 사회에 대해서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발해의 지배층은 왕족인 대씨와 귀족인 고씨등 고구려계와 말갈계귀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대부분의 말갈인들은 피지배층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통일 신라와 발해의 경제 사회를 알아보았습니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배워볼 수 있는 시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상으로 통일 신라와 발해의 경제 사회를 마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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